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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대로 철판 잘라내고 용접으로 서로 이어 붙여 매화 대나무 새 등 형상화

    
철판을 이용한 조환 작가의 작품 'Untitled'. 아리랑 갤러리 제공
우리가 익히 아는 화선지는 없다. 대신 차가운 강철판 위가 화선지다. 붓과 먹으로 사군자를 치고, 소나무나 대나무, 산 등의 산수화를 그려야 하지만, 이 또한 '아니다'. 강철판을 잘라 매화 나뭇가지와 꽃을 만들어 붙였다. 용접 자국은 나뭇가지 사이, 꽃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마치 종이 위에 먹을 치듯 그렇게 강철판을 절단하고 붙여서 사군자와 산수화를 완성했다.

한 가지가 더 있다. 강철판을 액자처럼 벽에 붙이니, 흰색의 벽면 전체가 화선지가 돼 '여백의 미'를 한껏 발휘한다. 이때 생기는 그림자는, 수묵화의 그것과 똑 닮았다. 묵직하고 차가운 강철판이 포근함이 묻어나는 한 폭의 산수화가 되었다.

아리랑 갤러리(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선보이는 조환(53·성균관대 교수) 개인전은 동양화와 조각의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미술을 보여준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제자로, 권위있는 월전 미술상 수상 등으로 한국 미술계에서 한창 주목받을 때인 1980년대 중반, 작가는 미국 뉴욕으로 가서 서양 조소를 전공했다. 동양화와 서양의 조각을 모두 경험한 그는 한국화의 현대적 변용을 통해 새로운 컨템포러리 아트(동시대 미술)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관념이나 정신에 치우신 전통 한국화의 틀을 벗고, 물질에 주목하며 재료와 기법의 확장으로 범위를 넓혔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철로 된 설치 작품과 수묵화 등 모두 20여 점을 내보였다. 붓과 종이 대신 작가는 용접기와 철판을 들고 산수나 대나무, 국화, 매화, 새 등을 재해석했다. 서예처럼 밑그림 없이 머리에 스치는 이미지대로 철판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 산수나 대나무 등을 형상화했다.

자유자재로 철판을 만지고 이어붙였기에 강철로 만든 소나무와 댓잎조차도 바람에 흔들리듯 살랑거린다. 물과 소금을 뿌려 녹 슬게 해 산화철의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은 검은색으로 착색돼 있다.

검은 대, 검은 매화, 검은 소나무 등 그의 작품은 흰 벽면 위에 걸렸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벽면과 작품 사이에 조명이 비쳐 중첩된 선과 음영을 만들고, 단조로운 질감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대는 대숲이 되고 댓잎은 이리저리 흔들린다. 강철판을 깎아 만든 산수, 매화, 대나무 형상은 서예의 필획을 연상케 하며, 흰 벽면 위에 내려앉은 은은한 그림자는 마치 화선지 위에 먹이 번진 듯 깊은 여운을 준다.

 

평론가들은 사진이나 글로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담아낼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한다. 작가의 손끝에서 한 폭의 산수화로 변한 강철 수묵화의 묘미를 맛볼 수 있다. 다음 달 10일까지 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