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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재현"

붉은 바닥에 회색 천정, 벽면을 따라 놓인 헬스기구들, 역기를 들려고 허리를 숙인 남자, 이두박근을 단련하는 기구를 당기고 있는 남자 등 모두 헬스장 안 정경이다. 그들 사이에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자. 좀 느닷없다(작품 '회원등록').

시멘트 계단식으로 정비된 수로에 머리를 감고 있는 여인('미래')이나 겨울 점퍼를 입고 방한장갑을 낀 채 종아리까지 물이 찬 개울에 서 있는 여인의 모습('세계')도 어색하고 엉뚱하다. 머리를 감아야 할 곳도, 들어서야 할 개울도 아니기에 불안하기조차 하다. 한 남자가 붕 날아올랐고 또 다른 남자가 그 밑에 깔아뭉개져 있다('공중부양').

아리랑갤러리(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초대전을 열고 있는 지역의 대표 여류작가 방정아 씨의 작품들이다. 이번에 전시한 작품 24점은 이처럼 느닷없는 순간, 일상에서 예기치 못하게 당혹스러웠던 일 등을 때로는 꿈같이, 때로는 환상 같이 표현했다. 전시제목은 '헐'. 놀라거나 어이없을 때 젊은층이 즐겨 쓰는 유행어다.

    
방정아 작가의 '2011년 3월'
2년여 만에 선보이는 작품들에 대해 작가는 "지난 2년간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명하게 엇갈린 삶의 모습, 4대강 사업 등 불필요하게 자연을 간섭하면서 펼쳐지는 삶과 죽음의 경계, 인위적으로 조성된 숲 등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다. 이번 작품들은 그동안의 삶에 대한 고찰, 저와 저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했고, 이 모든 상황을 '헐'이라는 말에 함축시켰다"고 설명했다. 예전의 작품들이 직설적 메시지에 터치가 강했다면, 이번엔 좀 더 은유적이고 모호하게 주제를 감추었다. 분명한 붓자국으로 인물을 묘사하기보다 면으로 처리한 기법도 눈에 띄었다.

일본 대지진의 참상이나 구제역 등으로 죽어간 뭇 생명을 애도하고, 20대의 방황과 40대의 애잔함 등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방 양 벽으로 놓인 이층 침대에 여인들이 느긋하게 눕거나 기대어 있다. 유리창 밖에는 시퍼런 파도가 넘실대고, 방 한가운데 자리잡은 더블 침대의 흐트러진 시트도 파도처럼 일렁인다. 일본 대지진을 은유한 '2011년 3월'이다. 소 대가리, 닭 대가리, 돼지 대가리를 손에 들고 있는 머리 없는 관음상도 보인다. 자기 몸을 우리의 식량으로 몸보시해왔지만, 구제역 등으로 잔혹하게 스러져간 소 보살, 닭 보살, 돼지 보살에 대한 일종의 진혼곡이다.

미술평론가 강선학 씨는 "현실 같은데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의 정합성을 잃은 상황이 이번 전시를 이끌고 있다. 이 비정합성의 현실 재현이 작가의 현실 이해나 인식의 새로운 장면"이라고 평했다. 작품 속 여인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얕은 물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일 것이다. 오는 30일까지.